아노하나, 내면의 역함과 성장의 서글픔
- 애니메이션/애니메이션 비평
- 2019. 5. 2. 01:42
많은 팬들에게 오랫동안 인정받아온 감동 코드로 감동적인 애니메이션을 추천할 때는 항상 이름이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작품이 있다. 그건 바로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약칭 아노하나다. 청춘과 성장을 주제로 한 드라마며 대략적인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소꿉친구 여섯 이서 '초 평화 버스터즈' 하지만 그중 하나인 멘마는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만다. 그때의 얽힌 기억과 사건들로 외견과 사회에서 바라보아주는 인식은 성장했지만 그때의 일에 마음 한 부분을 사로잡혀 각자의 고통 속에서 살아오게 되는데, 어느 날 주인공인 진땅 앞에 성장한 모습의 멘마가 나타나게 되고, 그때의 아픔과 지금의 속박을 함께 극복하며 성장하는 드라마다. 각자의 갈등이 공통의 갈등으로 개인의 문제가 전체에게 영향을 주는 등 풀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긴장감과 서사의 구조는 안정적이다. 애니메이션의 외부적인 만듦새도 토라도라의 제작진 대부분이 이어져 와 깔끔하고 의미가 충만한 화면도 이 애니메이션의 매력 요소중 하나다. 애니메이션의 만듦세, 이야기의 완성도, 흥행 모든 것이 뒤처지지 않고 오히려 성공했다 할 부분이 더 많은 애니메이션 아노하나, 필자도 이에 수긍하고 푹 빠져들어 감상했지만 한 가지 공감하지 못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바로 최종국면에 다다를 때 폭발하는 감동이다.
필자가 이 애니메이션을 항상 고대하고 관심사 속에 있었던 이유는 이 애니메이션의 감동적인 부분에 대한 사람들의 호응과 반응 때문이었다. 얼만큼 감동적이길래 항상 감동적인 애니메이션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으며 그 인기가 식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작품들을 감상할 때 눈물이 굉장히 많은 편이고 공감하며 감동한 한 작품 속에 푹 빠져 지칠 때까지 작품의 생각을 계속하는 걸 즐기기에 다른 작품을 접할 때 보다 더욱 기대를 하며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감상을 완료한 이 시점 눈물, 콧물 등 온갖 추태를 다짐했던 그때의 각오는 허무한 것이 되고 말았다. 있는 감동 없는 감동 전부 찾아서 눈물을 찾아 흘릴 지경이던 필자가 러닝타임 내내 건조한 눈을 적시지 못한 이유는 뭘까, 이 부분에 대해서 내면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캐릭터의 사례와 함께 생각해보려 한다.
'지금은 잃어버린 추억 속 소꿉친구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라고 한 문장만 들어도 뭉클한 심정이 전해져 오지만 이 감동적인 대사건에 얽혀있는 건 추악한 내면의 본질과 그들이 뒤섞인 진흙풀이었다. 오직 소원을 마저 이루기 위함이라는 멘마에게 밖에서 휘감고 있는 각자의 감정들은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사람이라면 가진 유전자에 각인된 타인에 대한 연정과 그로부터 태어나는 질투, 독점욕, 시기 등등 이 모든 것이 정도와 목적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에게 노골적으로 포함되어 있고 순수한 감동의 코드보다는 서로의 내면 성장에 관한 드라마에 너무 사로잡혀 감동을 느낄 마음의 여유를 받지 못했다. 최근 가장 감동적으로 봤던 작품은 극장 애니메이션 '옷코는 초등학생 사장님!'인데 그 애니메이션을 매 순간 옷코의 순수함에 빠져들어 감동했다면 아노하나에서는 그들의 치열한 욕망 다툼에 최종적으로는 전해지는 순수한 감동마저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감각이다. 이것이 극을 최종까지 끌고 가는 가장 주된 요인이기도 하고 이걸 무리하게 결부시켜서 이야기의 완성도를 떨어지게 만든 것도 아니다, 다만 순수함을 느끼기에는 악한 욕망의 충격이 컸다는 게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릴 적 그 날의 사건 때는 저마다의 마음 속 그림자가 이런 느낌을 불러일으킬 때까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가지고 있던 아픔을 이어나가고 키워나간 고등학생이 된 등장인물들의 심정과 행동은 다시 내려온 멘마라는 존재의 순수성에 비해 너무 추악했다.
먼저 가장 직접적으로 추태를 보이기도 했던 마츠유키 아츠무(유키아츠)는 일상적인 모든 대화에서도 냉소적인 태도로 대하기 일수이고 본인의 위치를 이용해 타인을 비하하고 자신을 높이기 위한 발상이 항상 전제되어있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그가 어린 시절부터 키워왔던 멘마에 대한 연정은 자신 잘난 맛에 살아오는 유키아츠에게는 가장 왜곡된 형태로 발전하기 좋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자신만의 멘마를 계속 만들어 오며 멘마와 닮은 드레스, 가발 등으로 멘마의 가장을 하기까지 이른 유키아츠는 예상치 못하게 멘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진땅의 이야기들을 무시와 냉소로 일관한다. 하지만 그 조차도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과 자기 위안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가장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들만을 이용하며 자신만을 상처 입힐 뿐이었다. 이런 위선 속에서도 멘마에 대한 자신만의 마음을 강조하며 멘마의 복귀를 눈으로 확인한 후에도 오직 진땅을 향한 질투심으로 멘마의 소원을 돕는다. 멘마의 소원을 이루어 멘마를 진땅의 곁에서 떨어트리는 것, 진땅만이 멘마를 볼 수 있는 걸 용납할 수 없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력은 강할수록 자신의 욕망의 강함을 반증하는 듯 해 심각성이 커지기만 했다. 게다가 이해 못할 언행과 상황 속에서도 항상 침착한 듯한 태도를 보이며 자기 보호적인 태도를 띄고 있어서 평범하게 가장하면 할수록 커지는 뒷 편의 어두움에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목표를 향한 순수성에 가장 큰 문제를 보이며 최종 국면으로 까지 공감해 나가는 필자의 마음을 자꾸 캐릭터 개인의 심각성으로 불러들였다.
직접적으로 거론하자면 '십년 전 죽었던 짝사랑의 모습을 따라 여장'과 '독점이 질투 나니 너에게서도 멘마를 앗아갈 것'이다. 이들은 얼마다 추악한 욕망과 개인적인 욕심의 실현이란 말인가. 외적으로만 보아도 뒤틀림에 기분이 나쁠 지경인데 이를 바탕으로 후반에서 보여주는 멘마의 소원을 위한 행동력은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불꽃놀이를 위해 멘마의 아버지에게 한 도게자까지도 전부 욕구 실현의 과정으로만 치부되게 여겨지니 전체적인 감동과 순수성에서 한없이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둘째로 안죠 나루코(아나루)는 어릴 적과 멘마의 재등장 언제든지 멘마와 진땅이 서로 좋아하는 상황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하며 자신의 욕망을 거시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처음부터 주인공을 짝사랑한다는 묘사로 멘마와는 경쟁자 관계였음을 암시하고 비교적 초반부터 주인공에게 동조하며 소원을 위해 노력한다. 주인공 개인의 성장에도 관여하거나 다른 인물과의 중재도 겸하고 있어서 순수성을 직접적으로 저해하는 모습은 비중에 비해 크지는 않지만 당시에 품었던 '사라져서 다행이었다는 마음'과 멘마의 소원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 했던 결론을 통해 이야기의 순수성을 해치는 데에 동조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다시 나타난 멘마는 이야기가 진행 되면 될수록 사랑의 방해자로 그녀 스스로 치부하며 순수했던 그때의 소꿉친구보다 고등학생 사춘기 마음에 찾아든 사랑의 방해물 까지도 여기며 추태의 심각성을 더해간다.
인물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며 아르바이트도 함께 하고 주인공을 옆에서 북돋워주기도 하는 등 멘마의 소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존재였지만 이건 그 과정 중에서 보여준 자신의 입지에 대한 여유로도 여겨지기도 하며 유키아츠보다는 덜한 정도라 하더라도 소원이 그리는 감동과 마지막의 여운에 집중하기 힘들게 만들 여지로는 충분했다.
진땅의 목적은 순수했지만 이 과정들에서 보여준 모습들은 결고 순수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보인다. 여름의 일시적인 환상으로 멘마를 치부하던 초반 상황때는 그렇다 쳐도 중반부부터는 유키아츠의 환상을 부수기 위한 때든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멘마를 독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진땅 자신의 어머니와 한 약속을 위해서 십 년 만에 다시 나타난 멘마에게 자신의 소원과 소망을 끊임없이 투영시켰다는 것은 달리 이를 바가 없다. 게다가 후반부부터 멘마의 요구에 많은 과자를 사 온다든가 했던 지나친 호응에서는 자신의 무의식적인 멘마에 대한 개인적인 바람(멘마의 현상유지)이 투영된 행위 등이 엿보인다.
멘마와 통하는 거의 유일한 창구로 기능하면서도 틈틈히 없던 말을 유키아츠에게 전하던 일에서도 멘마에 대한 유키아츠의 의중을 파악하고 행동한 모습으로 보여 모든 친구의 화합을 바랐던 멘마의 바람과는 다르게 개인의 독점을 중시했다는 모습에서 마냥 주인공의 순진한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외에도 츠루코, 폿포 전부 사랑의 실현과 속죄라는 개인적인 이유를 멘마의 소원과 결부시켜 오고 그를 바탕으로 동조하며 행동력을 보여준 것에 틀림은 없다. 저마다의 품고 있는 사랑과 개인적인 감정, 소꿉친구의 동화 같은 재림에도 우선순위는 욕망의 실현이라는 부분이 후반의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두드러지게 보였다.
먼저 멘마를 위한 파티에서 아나루와 유키아츠의 자조적인 마음을 한데 놓고 그들의 열등감을 확인하기라도 하듯 억지로 실시한 그때의 일 재현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로의 마음이 상대방에게 닿지 않는다는 걸 공유한 아나루와 유키아츠는 십 년 동안 잃었던 소꿉친구를 위한 마지막 파티라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자기 현시 때문에 아무도 승리하지 않는 만행을 벌이며 이벤트를 망치기까지 한다.
이런 자가당착들이 한데 모여 보여준 추함의 끝은 폭죽을 터뜨리고 난 후 멘마의 성불에 실패하고 밤의 신사에 모인 주인공들의 고해성사 장면이었다. 이야기 자체의 장치와 복선의 복잡성은 크지 않아서 크게든 적게든 인물 개인들이 품은 욕망은 계속 시청자들에게 노출시켰다. 이렇게 어림잡아 모두 각자의 본심을 이해하고 있던 차에 농축돼서 폭발하는 그들의 욕망과 그걸 직접적으로 육성화 해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이해는 하지만 공감은 하지 않는 심정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강화시켜나갔다. 서로의 오랜 감정과 사랑 때문에 울음을 주체 못 하며 그 와중에도 서로의 잘못과 연정을 고발하는 모습은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성장과 고통에 대한 서사 자체로만 보면 자연스럽고 어둡고 서로가 서로를 끌고 빠지는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리며 성장 드라마의 절정에서는 수준적인 묘사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것의 완성도가 높은 까닭에 모두가 입 모아 말하는 아노하나의 감동까지 그들의 검은빛으로 물들여져 버려 마음껏, 양껏 공감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마지막 모두에게 편지를 나누어줬던 클라이맥스는 자체로 몹시 감동이 이는 장면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그러한 순수한 감동 연출을 몹시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전 인물들의 더럽혀진 감정들에 너무 집중하는 나머지 이야기의 순수성에서 멀어진 곳을 주목하게 되었다. 진땅을 두고 벌어졌던 어릴 적 모의에서 보인 멘마의 반응도 그렇고 십 년 후 다시 나타난 멘마도 그렇고 항상 옛 소꿉친구들에게 당연하다는 듯 순수하고 밝게 항상 진실되게 마주하는 멘마의 모습은 주변의 뒤틀린 현시에 대비되어 숭고한 것으로 까지 보이기도 하였다. 어쩌면 이용당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멘마가 불쌍하게도 보이며 강림한 존재인 데다 친구 모두의 용서 화합을 바라는 모습에서 농담조로 예수의 일화들이 스쳐 지나가기도 하였다(만나 같은 찐빵을 친구들에게 대량으로 나누니 진짜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런 멘마의 순수하고 깨끗한 모습들을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마지막 장면의 감동을 더욱 깊이 느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다섯 제자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스스로 다른 점에 집중하며 완전히 빠져들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인간의 진실된 욕망의 지저분함은 이야기의 현실감과 몰입도를 높여주는 데 혁혁한 기능을 하지만 이것들의 극적인 활용으로 이런 결과로 느껴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에 새롭기도 하다. 빛이 너무 강하기에 그림자가 너무 크고 깊게 느껴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저 성불한 멘마에게 합장이라도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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