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이상향에서 하룻밤 '옷코는 초등학생 사장님!'
- 애니메이션/애니메이션 비평
- 2019. 6. 28. 12:24
언제부터 사람들은 정신적인 치유에 관해 주목하기 시작했을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함이라 할진대 정작 이 스트레스라는 말도 생긴 지 세기조차 넘기지 못했고 어쩌면 이 현대에 단어인 스트레스로 우리는 각종 환경과 요인들을 스트레스로 규정지어 치유할 거리를 쌓아 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삶의 여유와 풍족함에서 따른 행위일지도 모르겠으나 늘어나는 여유와는 반대로 누군가를 위한다는 마음,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항상 남을 생각하고 남을 위해 고민하는 소녀의 모습으로 현실적인 배경과 상상의 세계 모두를 아울러 치밀한 치유를 펼쳐 보이는 작품이 하나 있다. 바로 2019년 개봉한 ‘옷코는 초등학생 사장님!’이라는 극장용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모든 매체의 성장은 상업적인 요인에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고 대중들의 선호에 따라 어떤 분야든 영향을 받아왔다. 매 작품의 성장이나 방향의 차이가 이는 곧 사람들의 선호를 추적하고 쌓아 올리는 미디어가 대중을 바라보고 상대하는 능력의 성장이라고 보면 이번 ‘옷코는 초등학생 사장님!’은 이런 의미에서도 온갖 관록으로 관객들을 만족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는 세계 애니메이션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뚜렷한 현상으로 전 세계에 호소했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스튜디오 지브리 여러 작품 속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애니메이터이자 감독 ‘코사카 키타로’에게서 나온 힘이 아닐까 싶다. 항상 스탭과 상의하며 아름다운 세계를 구축하며 재현하려 노력했던 그의 수십 년 작품론과 고심의 결과를 그 만의 일본 마을 세계에서도 독자적으로 반영해 내었다는 데에서 그가 창조하려 했던 이상의 세계를 치유의 의미에 중점을 두고 완성도 있게 탄생시켜 보였다.
일본의 만화를 원작으로 두고 있는 이 극장 애니메이션은 이미 한 차례 TV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된 적이 있고 매력적인 배경과 이야기의 잠재력 덕분인지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기획되었다.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세키 오리코’라는 소녀가 할머니 손에 맡겨지며 또한 그 가업인 여관업을 돕게 되며 소실에 대한 극복과 성장을 다루고 있는 드라마다. 주인공 ‘세키 오리코’는 ‘옷코’라 불리는 씩씩한 소녀이며 유령이나 도깨비 등 보통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이며, 이들과 함께 만들어내는 옷코는 초등학생 사장님만의 독특한 드라마로 성장하는 옷코의 모습을 그려내 관객들에게 따듯한 치유의 힘을 선사한다.
바람 계곡의 나우사카와 천공의 성 라퓨타부터 시작해 귀를 기울이면, 원령 공주 등 저마다의 독자적이고 매력적인 세계를 항상 이야기의 시작으로 삼았던 것이 세계인들을 끌어들이고 감동케 했던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론이다. 이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최전선의 작화가, 혹은 감독으로 활동했던 코사카 키타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랬던 것 처럼 자기 이상 속의 일본을 만들어내 전설과 축제, 전통 같은 것들을 처음부터 다 만들어 내며 감독 스스로도 현실의 일본에는 이런 장소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치유가 가득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런 치유적인 공간을 기저에 완성시킨 체 이 작품은 동적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갈 온갖 치유적인 장치를 짜임새 있게 그리고 대비의 마술을 함께하며 모두에게 치유를 선사한다.
우선 시작부부터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그리고 온천마을 신사에 잔뜩 몰려든 사람들이 함께 마을 전통 춤 행사를 관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부드러운 동화와 사실감 있고 디테일한 정경 묘사로 일본적인 치유감 속으로 젖어 들게 한다. 그리고는 그 행사를 관람하는 옷코 네 가족만을 화면 안에 담으며 화기애애한 가족의 이미지를 그리는 동시에 어서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옷코의 대사와 같은 현실적인 아이의 반응을 통해 따듯한 이미지를 끌어올린다. 이 마을의 전통인 ‘하나노유 온천은 차별없이 모두를 받아들인다’라는 말 그리고 이 따듯한 심상의 조짐과 함께 가장 커다란 대비의 소재와 대단원의 전개가 시작된 것이다. 전통 무대와 귀가 장면에서도 이어지는 전통음악은 점점 더 크고 빨라지더니 반대편 트럭이 옷코네 가족을 덮치는 사고 순간에서야 일순간 끝난다. 지금 이와 같은 사건에서 극적으로 치닫는 상황 묘사와 더불어 바로 옷코의 소실을 나타내는 싸늘한 집, 그리고 할머니네 집으로 향하기 위한 기차 안 창문에 비치는 화기애애한 옆자리 가족의 모습들로 상실과 더불어 어엿하게 반응하는 옷코의 모습과 함께 옷코의 의젓한 성격도 함축적으로 드러내며 극 중 주인공의 성격과 전제를 알린다.
애니메이팅의 목적은 재현을 넘어 상대방에 심상에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라 한다면 여기서도 감독의 노련함과 관록 그리고 치유와 인간적인 드라마를 그리려는 목적지향적인 부분이 잘 드러난다. 자기 몸보다 커다란 캐리어와 함께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옷코의 모습을 담은 짧은 컷 조차 그저 평범하게 끌고 올라가는 게 아닌 중간부터는 힘든 묘사를 하면서 자세를 고쳐잡아 캐리어를 힘껏 밀고 올라가는 모습으로 세세하게 표현해냈다. 이런 과정에서 최대한 사람의 가까운 행동 묘사와 함께 옷코의 소녀스러운 인식으로 관객들에게 세세한 부분까지 캐릭터성과 작품이 추구하는 바를 인식시킨다. 이 뿐만 아니라 곳곳이 등장하는 아이들의 장난스러우며 부산스러운 행동 묘사와 어른들의 뻣뻣하면서도 자애로운 움직임 하나하나를 일본 애니메이션의 고전적이며 정겨운 향취를 그득 실어 모든 묘사에 있어서 그 디테일을 더해 관객들에게 움직이는 화면 자체로도 충분한 치유의 기분을 싣고 있다.
도착한 할머니네 여관은 크지 않은 규모에 일본식으로 꾸며진 정원과 함께 일본식 전통 건물로 하여금 차분하고 편안한 느낌을 제공한다. 하지만 옷코는 도착한 장소의 적응하지 못함과 더불어 이질적인 존재로까지 부각하게 만드는데 이것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옷코가 질색하는 곤충과 도마뱀이며 후반까지 계속 등장하며 옷코의 성장상태를 나타내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한다. 여기에 더불어 표면적으로는 유령의 형태를 하고 있는 상상 속 친구인 ‘우리보’와 만나게 되면서 이전과 다른 상황들에 겁먹은 옷코는 전부 싫다는 육성과 함께 거부감을 최대한 드러낸다. 이 유령 친구들은 옷코의 성장을 돕고 있는 듯하지만 모든 상실에 대한 재생은 옷코의 마음과 행동에서 나오는 대목이므로 직접적인 연관 자체가 없을 뿐 더러 옷코의 세계에 영향을 주는 존재 보다는 옷코가 자신의 성장과 발전을 역설하는 도구로 볼 수도 있다. 등장하는 세 명의 초 현실적인 존재 우리보와 미요 그리고 종돌이는 저마다의 특색을 지니고 종돌이는 손님들을 불러 일으킨다는 역할을 한다고 말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에 연관은 둔 것이며 직접적인 관계성을 영화 속에서는 구태여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셋은 특이성과 더불어 복잡한 장치로 사용되기 보다는 그저 움직임과 이야기의 인간됨을 바탕으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싣는 역할로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보로 인해서 옷코가 여관에서 작은 사장님으로서 일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고 생명의 은인이라는 묘사가 초반부 곳곳에 존재하는 바 우리보를 포함한 전체의 유령에 대한 존재를 흐림으로서 상황의 특이성과 설정에 집착하기 보다는 이들이 전하는 드라마 자체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아직까지 벌레를 꺼려하거나 연못의 벌레 시체를 청소하는 모습에서 완전히 여관과 주변 환경에 합치되지 못한 모습을 보이지만 이런 움직임은 전학 간 학교 첫 날 ‘마츠키’와의 인연으로 옷코의 발전이 촉진된다. 옷코와 마츠키 둘 다 여관 운영에 직접적인 관여를 한다는 면에서는 비슷하지만 운영 방식과 규모 그리고 태도에서 옷코와 마츠키의 대비가 드러나며 서로 발전하기도 하고 비교하며 취합하는 등 유령 3인방과는 달리 직접적인 발전의 계기로 옷코에게 들어온다. 유령이라는 존재와 함께하는 옷코와 그런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마츠키의 모습에서 둘의 차이를 전면으로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러던 중 옷코가 여관 일에 익숙해질 무렵 귀가길에 허름한 차림의 부자를 만나게 되는데 선뜻 이들을 여관으로 초정하기를 꺼리는 마음을 내비치지만 우리보의 조언과 함께 결국은 이들을 자신의 여관으로 안내하고 이들의 차림이 어떻든 성심성의껏 대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다시 한 번 ‘하나노유 온천은 모두를 받아들인다’라는 키워드를 깨달으며 옷코도 진정으로 치유의 세계인 온천마을 그리고 여관의 의미를 전적으로 수용한다. 지금까지는 도시에서 내려온 외지인 혹은 이 영화를 감상하는 현실 세계의 관객 입장에 더욱 가까운 위치를 취했다면 이제는 완전히 치유의 세계의 주민이 되어 이야기의 주제 자체부터 성장과 치유의 이야기로 관객을 끌고갈 준비를 마친 것이다. 옷코가 불러들인 손님은 한 소년과 장발의 남성, 아내의 성묘를 갔다가 온천 마을에 들리는 길이라 하는데 소년의 상황은 바로 이전 친족의 상실의 극복이 덜 끝난 채로 치유의 공간인 온천마을에 발을 딛게 된 것으로 바로 직전의 옷코의 상황과 똑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두를 받아들이는 온천마을의 마음과 함께 하게 된 옷코의 성장은 한층 더 성숙해져 실의에 빠진 소년 아카네를 성심성의껏 대해 다시금 희망을 찾게 만들고 손님을 대하는 여관 일까지 전적으로 익숙해진 성장한 옷코를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이 인연은 훗날의 작품을 관통하는 전체적인 교훈의 주제가 되기도 하는데 여관 비평가인 이 소년의 아버지는 옷코가 있는 ‘봄의 집’여관에 대한 글을 잡지에 개재하여 여관에 손님을 붐비게 만들고 옷코를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로 만든다. 여기서 진정으로 대하는 옷코의 마음과 그에 따라 일어난 좋은 결과라는 의미에서 작품을 직접적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메세지를 전면에 내비친다.
다음으로 옷코가 대하게 되는 손님은 점성술사 ‘글로리’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알아보고 그들을 위해 일을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기에 지금 성장해가는 옷코가 지향하는 모습 혹은 미래의 옷코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글로리의 여성스러운 모습과 멋진 행동들에 직접적으로 좋아하며 선망하는 모습에서 외적으로도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한 명의 손님으로 옷코가 진정을 다해 대하고 오히려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점성술사에게 자신의 노력과 열성으로 마음을 열게 만들어 그녀에게 치유를 하는 모습에서 옷코의 씩씩하며 손님을 대하는 태도의 성장을 다시금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글로리의 스포츠카를 타고 함께 쇼핑을 떠나는 모습에서 지금까지의 일본적인 색이 점철된 정적인 분위기만 있었던 정체를 시원하게 환기시킴으로써 영화 전체적인 구조로 봤을 때도 구체성을 더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열심히 한 것이 본인에게는 좋은 결과로 다가온다는 메시지 또한 이야기의 종결 부분에서 좌절한 옷코에게 이제는 반대로 글로리가 희망을 북돋워 주며 완결성 또한 더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손님은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아버지를 포함한 한 소가족이다. 손님으로서 외지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자체에다 세속적인 시선과 차분하지 못한 태도로 지금까지의 안정스럽던 분위기에 이전에는 없었던 낌새를 일게 한다. 그리고 가족의 일행 중 어린 아이의 모습은 현실적일 정도로 부산스러운 움직임 그리고 아버지에게 엉키는 모습과 함께 가족의 부재를 부각시키기도 하면서 이전의 옷코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고를 당한 적이 있는 손님 대문에 건강상의 이유로 간이 덜 된 음식을 여관에서 대접하자 이 모든 음식을 거부하기도 하는 모습에 옷코는 손님을 만족시키겠다는 일념으로 평소에 대립하는 마츠키까지 단숨에 달려가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받게 된다.
이질적인 손님의 모습은 잠시 미뤄놓고 마츠키와의 화해와 관계 발전에 대해 집중하게 만들어 이야기를 순조롭게 느끼던 와중 마츠키의 도움으로 손님을 만족시키다 갑자기 이야기의 종결을 선언할 정도의 커다란 파문이 일게 된다. 바로 사고를 당해 거동이 불편해 보이던 남자는 옷코의 가족이 타고 있던 차를 덮쳤던 트럭의 운전수였다는 것. 이를 알게 된 옷코는 사건이 전개될 때 마다 오버랩 되던 마치 살아있는 듯한 부모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떠올리며 ‘집에 가고 싶어’라는 말로 이전까지의 모든 걸 부정하려는 태도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글로리의 위로와 함께 마음을 다 잡고이에 대해서 옷코는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 중 가장 큰 동요를 일으키지만 열성과 성의를 다하는 옷코의 자세, 그리고 진정으로 여관을 위하는 마음과 함께 이 치유의 세계에 완전히 동화된 모습으로 마지막으로 ‘하나노유 온천은 모두를 받아들인다’는 키워드를 부각시키며 이전 일에 대한 극복과 최종적인 성장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부산스러운 모습의 아이와 포옹하는 모습으로 이전 과거 모습이었던 그 아이 조차 완전히 받아들이면서 과거의 자신의 모습 또한 긍정의 형태로 성장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인격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불안한 어린아이의 특성을 지닌 옷코를 전면에 내세워 치유의 공간인’ 하나노유 온천마을’에게 영향을 받고 하나하나의 반응하며 내적으로 가치가 형성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한정된 시간 내에 세 종류의 손님으로 옷코의 상태를 대변함과 함께 그를 극복하는 모습을 담아내는 전개의 능숙함도 감동을 이끌어내는 요소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동시에 최종적으로는 긍정적인 자신의 태도로 마을 전체의 뜻을 대변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어 뚜렷하게 성장과 치유의 이야기를 담아 보여주는 데에서 감독의 메시지 또한 뚜렷하게 표현하며 관객에게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론적 태도로 의미를 스스로 구현하거나 파악해 생산해내야 하는 식의 감상 방식을 원하지 않았던 작품 자체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지만 따라서 더더욱 치유의 의미 자체는 명확히 전달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따듯한 치유의 심상을 심어주는 옷코의 성장과 내면을 반영하는 또 하나의 소재가 있다. 바로 이야기의 전개 중 핵심이 되는 부분마다 도입부에 살아있는 듯한 부모님의 모습을 보게 되는 옷코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손님을 맞이하면서 성장하는 옷코의 사전 단계로 각 단계별로 부모님의 모습이 병치된다고 할 수 있다. 부모님의 상실과 함께 봄의 집 여관으로 오게 된 옷코가 여관 일을 돕겠다는 결심을 한 후 그날 옷코는 부모님의 침대로 몰래 숨어드는 장난을 하게 되는데 이는 아직 부모님에 대한 아픔을 떨쳐내지 못했음을 보여주며 아직은 온천과 마을에 거리감을 나타낸다. 다음으로는 여관일을 시작 한 후 시간이 흐르고 처음으로 전학간 학교에 가기 전 다시 부모님이 나오는 생생한 꿈을 꾸게 되는데 여전히 부모님의 품에 둘러 쌓인 모습이지만 그 장소는 이전에 부모님과 살던 집이 아닌 여관으로 옮겨옴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극복은 하지 못했지만 장소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옷코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첫 손님이었던 아카네의 돌아가신 어머니, 자신의 방에 있는 부모님 사진 앞에도 상을 차려 놓은 모습에서 죽음에 대한 의식을 단지 소실로만 단정짓지 않는 옷코의 성장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부모님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트럭 운전수가 손님으로 왔을 때 극도로 동요하는 모습에서 마지막으로 옷코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제는 그 부모님의 모습에서 위안과 그리움을 얻는 게 아니라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으로의 성장을 찾게 되고 최종적으로 부모님에 대한 극복 그리고 성장을 드러낸다. 이는 처음에 옷코의 어머니가 말했던 ‘어릴 때는 모두가 전통 춤을 추고 싶어 했다’라는 말을 이어 옷코가 행사에서 전통 춤을 추게 되는 완결적 구조와도 상통하는 부분이다.
이런 장치들 사이에서도 오직 치유에 집중할 수 있는 장치들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는데 유령과 도깨비의 등장에서도 이들의 다른 시대성 등이나 존재를 설명하려 하지 않으며 현실계에 간섭하는듯 혹은 오직 옷코의 상상일 뿐인 듯 그 정체성을 모호하게 남긴다. 부모님의 생생한 모습을 보게 되는 옷코의 상황도 어떤 때는 꿈 속에서 그 모습을 보는 듯 묘사하고 어떤 때는 옷코가 그 자리에서 실제로 살아있는 것 처럼 목격하는 듯이 묘사하기도 했다. 이런 모호한 장치들로 이들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고 이들과 함께 만들어내는 옷코의 드라마에만 관객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구성한 부분이 눈에 띈다.
복잡한 작가주의적 의미나 여러 배경에서 피어나는 의미들을 고심 끝에 찾아가며 이해하는 작품과는 거리가 멀 지도 모른다. 하지만 활기찬 소녀, 할머니의 가르침, 온천마을이 지녀온 따뜻한 전통, 재생과 진심의 메시지을 담은 명료하면서도 우리의 심부를 건드는 단순한 키워드를 이 작품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꼽을 수 있다. 이런 편안한 주제들을 한 명의 소녀를 내세워 편안한 드라마로 관객에게 흘러가듯 세밀한 치유를 전하는 작품 자체로 성공한 작품이었다고 보인다. 한 시간 반 정도의 짧은 러닝타임동안 환경에 대한 정착, 라이벌의 형성, 세 손님에 따른 심정의 변화를 모두 다뤄낸 부분과 새로운 등장인물까지 전면에 내세운 마지막 요동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전개의 급박한 모습이 엿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 조차 지브리의 관록이 엿보이는 생동감 있는 움직임과 사람의 내면에 집착하는 연출로 이런 부분 마저 감동적인 결말로 무리없이 풀어냈다. 애니메이션이 의미를 남기는 가장 큰 두 동력 눈으로 보며 직접적으로 심상을 만들어내는 외적인 면과 마음에 여운과 감동을 남기는 내용적인 면일 것이다. 이 모두를 관객을 위해 치밀하게 그리고 수준 있게 그려낸 일본 애니메이션으로서 완성도 높은 치유동화였다.
'애니메이션 > 애니메이션 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노하나, 내면의 역함과 성장의 서글픔 (2) | 2019.05.02 |
---|---|
뱅드림 1기와 2기 각자만의 '도키도키★키라키라' 비교 (2) | 2019.04.02 |
뜻밖에도 한국에 도착한 '리즈와 파랑새' (2) | 2019.03.30 |
케무리쿠사, 연기풀? 타츠키! (0) | 2019.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