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무리쿠사, 연기풀? 타츠키!
- 애니메이션/애니메이션 비평
- 2019. 3. 30. 13:37
한 해의 시작과 함께 신비함과 의문으로 점철된 새로운 세계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케무리쿠사, 직역하면 연기풀. 제목만으로 수십 바이트를 훌쩍 넘기는 요즘의 일부 작품들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간결한 제목이다. 정식 수입되지 않아서 번역명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주제의 주제만을 내포하고 있는 제목의 특성상 일본의 어원을 그대로 사용할 듯싶기도 하다. 어떤 대상을 접할 때 필요의 의해서든 편견의 의해서든 가장 외부로부터 접근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여기서 케무리쿠사는 직역으로도, 어원으로도 어떤 방향으로 쉽게 시청자에게 정보를 흘리지 않는다. 이 부분부터 타츠키 감독의 장치는 들어맞았는지도 모른다.
오모토 타츠키 감독의 2019년 1분기 신작 케무리쿠사, 타츠키 감독은 한국과는 달리 애니메이션 영화제가 활발한 일본에서 동인 3D 애니메이션 제작자로 활동하여 여럿 수상을 하기도 하고 동인 행사장에서 판매하는 인디 애니메이션을 판매고에 올리기도 하는 등 입지를 다지던 애니메이터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현지는 물론 한국과 여러 나라의 서브컬쳐 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케모노 프렌즈'때의 활약이 컸다. 케모노 프렌즈 때의 연출력과 흥행력으로 TVA 제작에 들어간 오모토 타츠키의 상업계 두 번째 공식 감독작으로서 또 한 번 그의 전개력과 흡인력을 마음껏 드러 낼 수 있었던 작품이 되었다.
붉은 안개에 둘러싸여
황폐해진 건조물이 즐비한 사람 흔적 없는 세상을 무대로
세 명의 자매가 살아나가는 이야기.
주요 인물로는 정돈된 머리가 특징적인 린,
고양이귀가 달려 있고 항상 점잖은 언니 성격인 리츠,
메이드같은 복장을 입고 천진난만한 성격을 지닌 무드 메이커 리나.
수수께끼 투성이인 세상에서
이 자매의 목적은 도대체…
-케무리쿠사 공식 홈페이지에서 공개된 줄거리
타츠키 감독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극의 배경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소규모 제작 단편들도 그렇지만 모두에게 친숙한 케모노 프렌즈도 해당 배경 속에서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생각할 만하다. 감독들은 특정 카테고리 안에 넣어져서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의 틀로 여기는 경우도 있을 만큼 경계하기도 하지만 특정 장르가 떠오른 다는 것은 그 감독에게 그 장르는 애호가들에게 인정받은 분야의 하나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탓인지 케무리쿠사의 흡인력은 노련함과 치밀함의 산물로 보이기도 했다.
사실 초반 때는 애니메이션 팬들의 호평을 사지는 못했다. 인기작 케모노 프렌즈와 그에 얽힌 일련의 문제로 화제가 완전히 가라앉기 전에 방영된 신작이라 급상승한 타츠키의 명성을 이어받아 어느정도 관심을 받기는 했지만 누구에게는 불친절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불확실한 전개와 부족한 세계관 묘사, 설명으로 감독의 명성에 힘입고도 많은 반응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어떤 이는 '잠이 오지만 타츠키라서 참고 더 봐 본다'라는 식의 의견으로 초반의 반응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전개할 때 흔히 3자의 내레이션 형식이든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서든 세계관의 설명과 그에 얽힌 등장인물들의 배경, 상황을 조금이나마 풀어서 시청자에게 제시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이번 극에서 보인 감독의 아포칼립스의 세상을 다룰 때의 자세는 평범한 수순과는 달랐다. 초반에 시청자를 위해 배경과 인물에 대한 묘사를 시작하는 것을 대신해서 끊임없이 배경과 인물에 대한 확실치 않은 묘사로 여러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는 동시에 정보 제공의 주체를 극 속이 아닌 자신에게 옮겨가도록 했다. 설명을 받지 못한 체 연기풀 세계관으로 떨어진 시청자들은 불쾌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이런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극 속으로 인도되었다.
연기풀, 폐허가 된 도시, 수수께끼의 자매와 주인공.
뚜렷한 키워드를 향한 모험이 아니었다. 이들의 모험은 평화, 생존, 세계의 수복 같은 목적이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만족감과 직결되어 있었으므로 그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어 나가며 각자 생존에 필요한 '물'만을 확보해나가며 정처 없이 떠나가는 여행길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청자들은 그나마 주어진 작은 단서들로 끊임없이 추측, 추론을 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더해 극 속에서 아무런 지식과 기억 없이 자매들 앞에 나타난 와카바는 시청자처럼 세계에 대해 알아가며 단서를 찾고 추리를 하며 시청자와 함께 성장해나가는 존재로서 하나의 몰입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동작할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시청자들을 극 속으로 빠지게 만들어 미지의 세계에서 체험과 같은 경험을 제공해 시청자들은 한결 더 자매들의 행동에 반응하고 새로운 대상에 대해 관찰하고 생각하며 극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장치와 형식의 작용 이외에도 이야기 자체만으로 특수하고 매력적인 것은 틀림없다. 여섯명의 자매는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라는 '최초의 사람'으로부터의 전언에 따라 좋아하는 것을 발견해가며 그들의 외형, 말투, 의복 등 각자 개성 있게 설정해 나갔다. 이렇게 생성된 개성들로 외형만으로도 충분한 매력을 선사해 주었지만 그들의 능력(좋아하는 것과 직결된)은 동화적이면서도 상황을 해쳐나가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어 저마다의 매력이 되었다. 거기에 이들 능력의 중심이 되었던 신비하면서도 인물들 가까이서 함께하는 연기풀, 이들을 탄생시키고 조율해내 인물 간의 구도에서 대사 방식까지 매력적으로 다듬어낸 타츠키 감독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 감독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적막함과 신비함이 공존하는 새로운 세계와 의문의 인물들 이들을 조합해 시청자들에게 저마다의 케무리쿠사를 키워나가게 만듦으로써 이야기가 진행되고 각자만의 케무리쿠사가 확고해지면서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극 속 인물들과 함께 여행하며 집중할 수 있었다.
내적으로 간단히 알아 보았지만 이야기를 전달하는 캐릭터의 외형 또한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케모노 프렌즈 때 동물에 대한 남다른 식견과 해석을 바탕으로 한 디자인으로 제작을 얻어냈던 타츠키 감독의 캐릭터 조형 실력은 케무리쿠사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각자 캐릭터의 개성과 목적에 따라 결부되어 있는 차림과 자매들 사이의 확실한 구분은 각자의 뚜렷한 매력을 보여주면서도 국적과 나이를 초월한 각자의 의복으로 신비감까지 제공한다.
종종 3D 작화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꺼려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의 개인적인 생각은 평소 접해지던 애니메이션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보통의 셀화 혹은 디지털 방식의 2D애니메이션 이 주를 이루고 흔히 통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케무리쿠사의 감상을 꺼려한다면 재고를 권하고 싶다. 극 속 캐릭터들은 우리들의 세속적인 시선과 사상이 없고 그들만의 가치관 다르게 보면 저마다의 목적만을 가지고 그걸 위해 행동하는 모습은 깔끔하고 순수해 보이기까지 한다. 여기에다 투영된 타츠키 특유의 3D작화는 그들의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고 오히려 단순 명료한 움직임은 캐릭터의 생각과 가치관을 더욱 투명하게 보여주는 상승작용으로 까지 보이기도 한다.
케모노 프랜즈 때 혹자들은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즐기며 보면 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와는 조금 더 다각적으로 접근 가능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어서 토착적, 종교적 모티브가 눈에 띄기도 하고 저마다의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니 이건 생각을 하며 재미를 발견하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더욱 넓게 보면 케모프레 때의 자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관람방식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케무리쿠사의 모습, 적(빨간 벌레, 빨간 나무)들의 모습과 모티브를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에서 떠나 그저 인물들의 행복에 집중하고 인물들의 여정과 자매들 사이의 기쁨에 집중하며 어수룩하고 귀여운 타츠키 3D의 매력에 빠지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그들의 대화에 같이 웃으며 즐기는 게 타츠키식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라고 느껴졌다. 이렇게 글에서 제시했던 대략적인 방법을 따라 연기풀 원정대의 여정에 가벼운 마음으로 탑승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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